(2012년 7월 7일(토) 기독교보 게재 변종길 교수) 새로 번역된 사도신경은 어떤 원본을 가지고 번역했는지 나와 있지 않아 정확한 검토가 불가능하다. 라틴어 본을 대본으로 했는지, 헤라어 본을 대본으로 했는지도 모르고, 또 어느 시대에 누가 작성하거나 받아들인 것을 대본으로 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의 여러 대본을 참조하여 새로운 번역 사도신경을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1. 전능하신 아버님, 먼저 전능하신 아버님이라는 표현은 어색하고 성경적 용법에 맞지 않는다. 헬라어판에는 테온 파테라 판트라트라고 돼 있고 라틴어판에는 데움 파트렘 옴니 포텐뎀(deum patremomnipotentem)으로 돼 있다. 이 경우 ‘전능한’이라는 뜻의 ‘판트라트라’ 또는 ‘옴니포텐템’이라는 형용사는 문법상 ‘하나님의 아버지'(대온파테라, 대음파트렘) 전체를 수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모두 ‘대격’이다). 이 중 하나의 단어를 지적하면 ‘하나님'(태온, 따뜻하게)을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매우 많이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엘 샤다이’ 즉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고(창 17:1, 35:11, 출 6:3) 이삭도 그렇게 부르셨다(창 28:3). 때로는 간단히 ‘사대'(전능자)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창 49:25, 룻 1:20, 21, 욥 5:17, 6:4, 8:3). 신약성경에서는 ‘호테오스 호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하나님)로 불리기도 하며(총 4:8, 11:17, 15:3, 16:7, 14, 19:6, 15, 21:22) 또는 ‘호판토크라토르'(전능자)로 (총 1:8) 또는 ‘큐리오스 판토크라토르'(전능한 주)로 불리기도 한다(후 6:18). 이상의 용례를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한 번만 ‘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그 외의 경우에는 모두 ‘주님’과 연결되어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관용화된 표현이다. 어떤 경우에도 ‘전능한’과 ‘아버지’가 바로 연결돼 사용된 예는 없다. 따라서 새 번역의 ‘전능하신 아버지’는 문법적으로나 성경의 용례에서나 잘못된 번역이며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옳다. 2. 유일한 아들 ‘유일한 아들’이라는 번역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헬라어로는 모노게네, 라틴어로는 우니쿰이다. 헬라어의 「모노게네스」(주격형)에 대해서는 논의가 많다. 첫째, ‘하나뿐인, 유일한'(one and only, only)으로 볼 수도 있고 둘째는 ‘독특한'(unique)으로 볼 수도 있다(Bauer 사전). 두 번째 경우는 ‘독생했다'(only-begotton)로 번역할 수 있다. KJV에서는 ‘only-begotton’이라고 번역했지만 NIV에서는 ‘one and only’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루터역에는 “eingebornen”(독생했다)으로 옮겼고, 화란국역에서도 “eeniggeborenen”(독생했다)이라고 번역하였다. 따라서 이 단어(모노게네스)의 번역은 신중해야 한다. 예수님은 오직 숫자적으로 하나뿐이라는 뜻(독자, 외아들)이 아니라 물론 이 의미도 포함되지만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의 독특성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신약성경에 쓰이는 다른 표현인 먼저 태어난 자(프로토코스)라는 단어가 단순히 출생순서에서 먼저 태어난 의미뿐만 아니라 영광을 받은 그리스도 높이 평가된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는 것(롬 8:28, 골 1:15, 18, 총 1:5 등)과 같은 맥락이다(cf. Bauer 사전). 바우어 사전을 보면 이 두 번째 의미에 무게를 두고 많은 문헌을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 라틴어 사도신경으로도 볼 때 모노게네스를 그대로 우누스(일의)로 번역하지 말고 우닉스(독특한)로 번역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며 신중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확실한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외톨이 아들’ 즉 ‘외톨이’로 하는 게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는 또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미 독생자라는 표현에 익숙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3.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한국어 사도신경의 대표적인 오역이지만 새로운 번역으로 개정되지 않고 이전의 오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에피폰티우 피라투’이고 라틴어 원문은 ‘스프폰티오 피라토'(sub Pontio Pilato)다. 여기서 헬라어의 ‘에피'(+속격)는 ‘…일 때…’의 치하에’라는 뜻이다(Bauer, s.v.epi, no.18).라틴어 ‘숲'(sub) 역시 ‘…의 치하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 때’ 고난을 겪으셨다는 뜻이다. 즉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당했다는 뜻이다. 물론 이 말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최종 판결한 사람은 빌라드니 그의 책임도 크다. 그러나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런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이 ‘언제’ 고난을 받았느냐는 것이다. 즉 ‘본디오 빌라도 때로’,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오역이 고쳐지지 않은 것은 새 번역의 의미를 크게 퇴색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4. 국어학적 문제 외에도 생각할 만한 작은 문제들이 있다. ‘성스러운 공교회’에 대해서는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지만 과연 한국 성도들이 ‘공교회’라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만하다. 화랑개혁교회에서는 ‘보편적 교회’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좀 더 쉽고 명확한 말이 아닌지 검토해볼 만하다. 그 외에는 문체문제와 국어학적 문제가 있는데 여기서는 길게 논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문제다. 위의 새로운 번역은 딱딱한 문어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말하자면 중학교 영어시간에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옮긴 것 같다.즉, 순수한 한국어가 아니라 번역체의 어투가 너무 많다. 이는 이전 사도신경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어와’라는 문장과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사도신경은 예배 때 사용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히 정확한 번역만이 아니라 순수한 한국어 문체로 다듬어져야 하고 순화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암송하고 고백하기에 좋도록 최대한 간결하고 시적이어야 하며 감칠맛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위의 새로운 번역에서는 인칭 대명사 ‘나’와 ‘그’, ‘그의’를 많이 사용했는데 가급적 이런 인칭 대명사를 생략하는 것이 우리말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이라도 꼭 필요한 경우에만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가급적 생략하는 것이 우리말 어법에 맞다고 할 수 있다. ‘오르시아’도 어색한 문어체이고, ‘믿습니다’와 ‘계십니다’ 살아 있는 자도 살아 있는 자에 비해 간결하지 못한 표현이고 죄를 용서받는 것도 조금 생각해 볼 만한 표현이다. 믿어줘와 믿고 사와 사이의 어감 차이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국어학적 문제와 문체 문제에 대해서는 국어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일반 국어학자가 아닌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한 믿을 수 있는 국어학자로서 성경 용어와 교회 언어 생활에 익숙하면서도 한국어에 정통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여러 번역 시안을 만들어 각 교회에 돌리고 어떤 문체의 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면 될 것이다. 사도신경은 단순히 우리 교단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성도 전체가 사용하는 공통된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한인과 동포 모두가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므로 내용상 옳을 뿐만 아니라 암송하기 쉽고 사랑받는 고백이어야 한다. (2012년 7월 7일 (토) 기독교보 게재 by 변정길 교수)